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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라캉/바디우의 자기계발

라캉에 대해서만 유독 “나의 라캉은 그렇지 않아,” “그건 네가 라캉을 잘 몰라서 그래” 라고 고집부리는 사람이 그리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 글은 이전 글에 이어지는 글이다. 또, 이 글은 백상현이 “라캉의 루브르”보다 일년 전에 쓴 다른 책에 대한 서평이다: 백상현. 고독의 매뉴얼. SFP-위고, 2015.


왜 그의 라캉은 그렇지 않을까? (위 저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라캉 연구자들이 8–90년대 대학을 다니고,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끝나고 나서, “Now what?”이라는 질문을 던지며 포스트모던, 구조주의, 탈구조주의, 라캉, 푸코, 데리다, 들뢰즈 등을 접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백상현은 말한다.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헛된 욕망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삶이 전개될 수 있는 다른 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잘 알기 때문이다. 삶은 그렇게 우리가 아는 그대로이며, 영원히 그러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은 철지난 사변적 논쟁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백상현, 라깡의 루브르.

이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는 이어서 말한다. “진리는 없다. 혹은 그것은 없음의 형식으로 있다” (백상현, 라깡의 루브르.). 라캉은 흥미진진하다. 마치 양파껍질 까듯이. 함정은 다 까고 나면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이다. 그럼 왜 그걸 하느냐고? 양파 까는게 재밌기 때문에… ?


바디우는 나름 재밌는 사람이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실망하게 된다. 다 까고 나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마오주의자이자 수학자. 흥미롭지 않은가? 일단 그게 다라는 점을 인정하고 시작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다 까고 나면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새로운 세상을 이야기한다! 어떻게?

수학에는 멱집합이라는 것이 있다 (영어로는 Power Set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부분집합으로 구성된 집합이다. 모든 부분집합의 집합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공집합과 자기자신이 포함된다. 무슨 말인고 하면, 0, 1 두 숫자로 이루어진 집합이 있다고 하면, 이 집합의 부분집합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1. {}
  2. {1}
  3. {2}
  4. {1,2}

즉 멱집합에는 4개의 원소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래의 집합이 두 개의 원소를 가졌으므로, 멱집합은 당연히 원래 집합보다 크다. 그러니까, 다음의 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것을 칸토어의 정리라고 하는 모양이다. 바디우에게 새로운 사회가 가능한 이유는 한 사회의 부분집합의 합은 언제나 사회 전체보다 크기 때문이다.

잠깐만, 그렇다면 이것은 원집합이 공집합일 때도 성립할까? 당연하다. 왜냐하면, 말장난 같지만, 공집합은 집합의 원소가 없는 것이고 (즉 원소 수가 0개이다), 반면 공집합의 멱집합은 공집합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걸 수학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러니 1은 0보다는 큰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상은 가능하다. 증명 끝.


그건 수학 이야기이고, 사회에서는 새로운 것이 가능한 방식은 이렇다. 양반과 상놈이라는 두 원소가 있을 때에는 양반과 상놈의 이종교배를 통하여 새로운 사회가 나온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원소가 있을 때에는 두 원소의 다양한 교배를 통하여 새로운 사회가 나온다. 꼭 특정 방식의 “교배”를 고집하지는 말라는 뜻이다. 수학에서는 공집합과 자기자신이 있어서 칸토어의 정리가 성립한다. 사회는 그 반대이다. 공집합과 자기자신을 뺀 다양한 조합 때문에 사회는 구성원의 합보다 큰 것이다.

주의하라. 이것은 새로운 사회가 가능한 이유에 대한 (바디우식의)(수학적) 증명이지, 이것이 꼭 진보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진보란 무엇인가? 따지고 보면, 변증법이 없으면 진보는 없다. 따지고 보면, 진보는 환상이다. 따지고 보면, 복잡성이 증가한다고 해서 딱히 진보하는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뭐 그렇게 따질 것 없다. 새로운 것은 부분의 다양한 조합을 통하여, 실험을 통하여 가능하다. 따지지 말고 이것저것 해 보라는 것이다.


개인 이야기도 해 보자. 내가 영어와 코딩을 잘 한다고 했을 때, 예를 들어,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자꾸만 조합하다보면 뭔가 새로운 것이 나올 것이다. 주의할 것은 여기에는 공집합 즉 {} 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안할 자유이다.

내가 영어도 잘하고 코딩도 잘하지만, 그래도 아무 것도 안할 자유이다.

백상현은 여기에 주목한다.

올바른 일을 한다는 것은 올바름을 욕망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 관련하여 가장 올바른 행위는 매순간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창안해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존재를 욕망하는 것이며, 존재를 욕망함은 공백을 욕망함이다. 유령들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공백에 대한 욕망이 공백에 대한 매혹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백상현, 고독의 매뉴얼.

“매혹적인 발상” (그의 말을 그대로 따르자면)이지만, 이것은 결국 라캉의 변주일 뿐이다. 그가 부제에서 약속한 “바디우”는 아니다. 바디우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냥 끊임없이 사부작거리다보면 뭔가 새로운 것이 나올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백상현은 아주 매력적인 라캉 독자이다. 그렇지만, 바디우 독자는 …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