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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라캉의 루브르

나는 라캉을 싫어한다. 좀 좋아하고 싶었지만, 나와는 첫만남이 잘못되었던건지…

특히, 나는 내가 라캉에 대해서 누구에서 무슨 이야기라도 하면 의례 나오는 “그건 네가 라캉을 잘 몰라서 그래”라는 이야기를 아주 싫어한다. 거의 라캉 추종자들을 혐오하게 하는 수준이다.

굳이 라캉에 대해서 많이 읽은 것도 아니고 (서너권 정도 읽은 듯 하다), 특히나 첫 책이 좀 끔찍했다. “How To Read 라캉”인가 하는 책이었는데, 도대체 번역이 문제였는지 뭐가 문제였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 영어 원서로 사서 읽었다. 나중에 보니 두 권이나 샀다. 악연이다.

언젠가 “옥스포드 살인 (Oxford Murders)”인가 하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좀 기이한 수학자들이 많이 나오는 영화였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미친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궁금해서 자기도 미치려고 수술을 하는 장면이 나왔다. 뜨아했다. 첫째, 그렇게 수술하면 (뇌의 일부분을 제거하는? 뭐 그런 수술이었던 것 같다) 심지어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도 미치는거지 미친 사람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둘째, 심지어는 관찰했다 하더라도 다시 정상인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걸 어떻게 설명할건가?

라캉은 뭐 나름 이해할 수도 있다. 이 수학자와 같은 짓을 하고 있는 셈이니까. 첫째, 정신이상에 대해서 어떻게 합리적으로 그러니까 “합리성의 테두리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둘째, 설령 그걸 한다고 하더라도, 그걸 어떻게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전달할 것인가? 이런 말도 안되는 프로젝트를 하려다보면 당연히 뭔가 이해할 수 없는 텍스트로밖에 나오지 않겠는가? 아니, 그게 이해가 되면 독자가 이상한거지.

솔직히 나는 라캉 추종자들을 싫어하는 것 같다. 그걸 어떻게 이해한단 말인가? 그리고, 설령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감히 다른 사람에게 “너의 라캉 이해는 틀렸어. 나의 라캉은 그렇지 않아”라고 말할 배짱이 어디서 나오는걸까?


추종자의 독단이 싫어서 라캉 자체를 싫어할 이유는 없고, 그는 아주 독특하고 매력적인 사람이다. 이해가 안되는 게 한 두가지 있는데 (굳이 라캉이라기보다는 정신분석 전반에 대해서),

첫째, 그 사람의 과거사에 어떤 문제가 있었고, 그것이 현재 이런저런 증상으로 나타났다는 “분석”을 들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그 이야기를 왜 할까? 마치, 과거 귀신 쫓을 때 귀신의 “이름을 알면” 무력화하고 쫓아 낼 수 있다고 믿는 구마의식 같다. 그게 무슨 도움이 되는가?

둘째, 특히 라캉은 치료가 목적이 아니라고 했다고 한다. 그럼 뭐가 목적일까?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치료”가 사회에 편입되어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하는 것이 더 나은 상태라는 가치판단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듯 하다. 그럼, 그래서? 이 책에 따르면, 치료는 불가능하고 관리가 목적이라고 하는 듯 하다. 이것은 치료가 목적이 아니라고 하는 말과는 조금 다르다. 치료가 되면 좋겠지만, 불가능하니 상담 등을 통해 꾸준히 관리하라는 이야기 아닌가? 마치 당뇨처럼. 그냥 같이 사는 방법을 배우라는?

셋째, 정신에 이상이 생기면 특정 방향으로 이상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마치 “모든 사람은 똑같이, 같은 방식으로 미친다”는 주장?


각설하고, 이 책은 아주 읽을만 하다. 가독성도 좋고, 읽는 느낌이 편안하다. 그래도 나는 이 책을 읽은 몇 안되는 사람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백상현. 라깡의 루브르. 위고, 2016.

저자에 따르면, 정신병/비정상은 질서 사이의 균열에 대한 대응이다. 아니, 사고의 균열 내지는 언어의 균열일 수도 있다. 질서의 균열이라고 하면, 무질서가 떠오르는데, 무질서는 쉽게 이미지로 떠 오른다. 언어의 균열이라면, 문제는 다르다. 말로 포착되지 않은 그 무엇을 어떤 말로 설명할 것인가?

질서/이미지/사고/언어의 균열이 생기면, 사람들은 둘 중의 하나를 한다. 질서 속으로 균열을 우격다짐으로 집어 넣거나, 아니면 질서를 부인한다. 전자를 저자는 강박증 내지는 성도착이라 한다. 후자는 정도에 따라 히스테리일수도, 멜랑꼴리일 수도있다. 이 네 가지 증상에 대해 저자는 설명한다.

이 책의 진짜 묘미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대체로 르네상스 시대?) 미술작품에 대한 평가이다. 저자가 철학 뿐 아니라 예술을 공부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책에서 라캉에 대해서 이해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예술감상에 대해서는 한두 가지 얻어갈 수 있다.

고전주의적 사유는 바로 이러한 외부의 침입, 즉 카오스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다. 그런 의미에서 베르사유 건축은 고전주의적 사유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병리적인 지점이기도 하다. – 백상현, 라깡의 루브르.

루브르가 중세적 세계관을 지배하던 종교적 광신의 고립된 담론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하는 새로운 아버지를 선택했던 이유 역시 정교한 기표 순환을 허용하는 르네상스-근대 담론을 통해 사물의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 백상현, 라깡의 루브르.

다음으로 넘어가자면, 그 반대의 경우는:

그녀는 세계의 불가능성 자체를 보고 있다. 이것은 궤변이 아니다. 1장에서 우리는 우리의 지각이 어떻게 충동의 대상인 사물을 피해가기 위한 방식으로 인식의 체계를 구성했는지 살펴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지각은 언제나 오인의 산물이다. 혹은 바로 그러한 지각의 ‘조직적 오류’가 우리의 삶을 견딜 수 있게 만들어준다. 만일 우리가 사물 자체를 볼 수 있다면, 현실을, 라캉이 ‘실재’라고 부르는 것을 직시할 수 있다면, 그것이 폭로하는 잔혹한 허무에 질식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백상현, 라깡의 루브르.

멜랑꼴리와 성도착에 대한 이야기는 이 두 이야기의 변형이다. 한 가지, 칸트의 결벽증을 사드와 비교한 부분은 흥미롭다.

사드는 다음과 같은 쾌락의 정언명령을 제시한다. “나는 너의 육체를 통해 쾌락을 즐길 권리가 있으며, 다른 누구라도 나에게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권리는 그 어떤 한계도 나의 변덕스런 취향 속에서의 만족을 멈추지 못하게 하도록 향유될 것이다.” 여기에서 사드는 정확히 칸트의 정언명령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칸트는 정념의 억압을 위해 도덕 명제를 소환하고 그것에 집착했지만 사드는 같은 형식을 빌려 주이상스의 의지를 추구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드의 이와 같은 정언명령적 향유 원칙이 칸트가 피해가려 했던 대타자의 존재를 출현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백상현, 라깡의 루브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상관 없다. 적어도 아래와 같이 멋진 그림과 해석 – 해몽 – 을 구경할 수 있지 않은가?

라캉의 루브르 페이지
그림: 라캉의 루브르 페이지

좀 단순화한 느낌은 있지만, 그의 다른 책도 읽어 보고 싶다.


앞에서 말한 “나의 라캉”을 읊는 사람 가운데 지젝을 빼놓을 수 없다. 만난 적은 없지만. 모르는 것에 대해 아는 척 하기 (이슬람), 전후좌우 고려하지 않고 논리적 극단으로 끌고가서 우기기 (에코파시즘), 아무렇게나 입에서 나오는 대로 여과 없이 배설하기 (대부분), 특히 마지막이 거슬리는게 마치 자기가 환자이고 독자는 자기를 분석해야 하는 것처럼 환자 흉내내는 것으로 저자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듯한 태도, 그 과정에서 증명도 논증도 설명도 해명도 필요없다는 식의 배설적 철학하기… 한국의 많은 소위 대중 사상가 내지는 연예인 흉내내기 철학자들과 비슷한 부류가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조금 위로가 된다. 그렇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