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사회부적응자의 마지막
그는 사회부적응자였다. 나치독일을 피해 파리로 도망간 유태인 공산주의자가 파리의 망명자들과 공산주의자들 모임과 외국인 수용소를 오가다가, 결국 비시정권이 수립되자 뒤늦게야 미국으로 망명가기 위해 이리저리 도피해 다닌 사람이 딱히 사회적응자라면 그것도 이상하겠지만, 그래도 발터 벤야민은 사회부적응자였다. 그와 수용소 생활을 같이 한 친구 리자 피트코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컵에 관한 모종의 이론을 수립한 후에야 찻물이 담긴 컵을 대면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 브루노 아르파이아, 역사의 천사.
이어서 브루노 아르파이아는 이렇게 평한다. “벤야민은 항상 삶을 작은 조각 단위로 취했고, 이제 삶이 복수를 하고 있었다” 브루노 아르파이아, 역사의 천사.
극단의 시대를 살아 갔던, 결국은 에스파니아로 가는 국경을 넘지 못하고 국경선에서 자살한 사회부적응자의 전기에 브루노 아르파이아는 왜 그렇게나 매달렸을까? 그와는 대조적으로 1934 스페인의 혁명과 내전에 몸으로 싸웠던 라우레아노 마오호는 벤야민과는 대척점에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역사의 덫에 갇힌 인물이다. 그들의 대화를 보자.
발터가 헐떡이며 웅얼거렸다. “나는 졌습니다. 항복이에요.”
“졌다라.” 라우레아노가 휘 한숨을 쉬었다. “그건 무슨 말입니까? 수두룩하게 졌지만 저는 이제 둔감합니다. 맨날 지지만 여기 이렇게 있습니다. 브루노 아르파이아, 역사의 천사.
같은 시대 같은 공간을 살았지만, 머리와는 거리가 먼, 온 몸으로 역사에 부딛쳤던 라우레아노에게 진다는 것은 몸과는 거리가 먼, 머리로만 역사를 직면한 벤야민의 패배와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간극이 있다.
진보란 무엇인가? 복잡도가 높아지는 것 (자연), 내지는 조직도가 높아지는 것 (사회). 적어도 그렇게 배웠다. 여기 어디에 구원이 있는가? 공산주의와 파시즘이라는 역사상 최고 수준의 “진보” 앞에서:
“클레가 그린 ‘앙겔루스 노부스’란 그림이 있어.” 도라가 타이핑한 이 문장은 벤야민의 가장 유명한 구절 가운데 하나다. “천사가 나오는데, 골똘히 생각하는 무언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천사의 눈은 응시하는 시선이며, 벌린 입에, 날개를 펴고 있다. 바로 이것이 역사의 천사다. 그의 얼굴은 과거를 돌아보고 있다. 우리는 일련의 사건을 보지만, 그는 하나의 재앙을 본다. 그 단 하나의 파국 속에서 잔해가 쌓이고 있다. 천사의 발 앞으로 돌무더기를 거칠게 게워내고 있는 것이다.”1
“살인 얘기예요?”
“아니, 잔해. 도라, 잔해라구. 그 단 하나의 파국 속에서 잔해가 쌓이고 있다. 천사의 발 앞으로 돌무더기를 거칠게 게워내고 있는 것이다. 천사는 머물고 싶다. 죽은 사람을 살리고 싶다. 박살난 것을 온전한 형태로 되돌리고 싶다. 하지만 낙원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다. 바람이 사납게 천사를 때리고, 해서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 없다. 천사는 폭풍에 저항할 수 없고, 미래로 내몰린다. 잡석더미가 천사 앞에서 하는높이 치솟는다. 우리는 이 폭풍을 진보라고 부른다.” 브루노 아르파이아, 역사의 천사.
진보를 믿었으나, 그러니까 진보를 회의하지 않았으나, 그 일부가 될 수는 없었던 사람, 마르크스주의자이고자 했으나, 진보의 열차에 편승하려 했으나 결국 그 열차에 깔려 버린 사람 이야기이다. 인공지능이 가져올 장미빛 미래에 낙관하나, 거기에 내 자리는 과연 어디에 있는지 불안해하는 사람들, 정의가 구현되어야 한다고 믿지만, 정작 정의가 구현되면 설 자리가 없어지는 사람들, 내가 꿈꾸는 미래는 나의 구원이 될 수 없는 사람들. 미래를 동경하나, 미래의 일부가 될 수 없는 사람들.
참고문헌
- 브루노 아르파이아. 역사의 천사. 번역자: 전병선. 오월의 봄, 2017.